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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한의 두번째 뇌

연세대학교에서의 3번째 학기를 마치며

by DeveloperHan 2021. 6. 21.

작년 11월 카투사에 합격해서 올해 7월에 입대하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다. 입대일 결정부터 실제 입대까지의 텀이 상당히 긴 편이다. 남들보다 빠르게 입대일이 결정되어서 내가 빨리 입대하는 편이겠구나 싶었지만 1학기 동안 엄청나게 많은 지인들이 입대를 했다.

 

CS의 다양한 분야들 중 관심 있는 분야가 많았기에 얼른 이것저것 공부하고 싶었지만, 이미 한 학기 후 입대가 결정된 상황이라 공부해 봤자 흐름이 끊길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3번째 학기는 '전역 후 원하는 전공 강의를 마음대로 들을 수 있도록 prerequisite를 모두 채운다'라는 목표를 가지고 시작했다.

 

공부 이야기는 보기 싫을 수도 있으니 접은글로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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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1학년 때 계절학기까지 들어가며 교양과목은 모두 수강해서 이번 학기는 졸업에 필수인 전공기초 3과목(이산구조, 선형대수, 확률통계)과 전공필수 1과목(자료구조), 전공선택 2과목(컴퓨터시스템, 오토마타)으로 6전공 학기를 보냈다. ㅋㅋ 사실 수강신청을 하면서 전공기초 3과목과 컴퓨터시스템에는 큰 의미부여를 하지 않았고 이번 학기 가장 기대하고 열심히 들었던 강의는 자료구조 오토마타(오토메타)였다.

 

자료구조(Data Structures)의 경우 1학년 겨울방학 때 problem solving에 힘을 쏟아서 대회도 나가고 상도 타고 했기 때문에 각 자료구조의 역할이라던지 사용법 등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강의는 이런 수준을 훌쩍 넘어 time complexity를 분석하는 여러 가지 테크닉, 몇몇 알고리즘(Dijkstra's, articulation point, MST 등)에 대한 formal한 분석 등 훨씬 더 수준 높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수강신청 즈음 선배들에게 교수님에 대한 몇몇 정보들을 들었다. 한 때 훌륭한 성능의 TSP 알고리즘을 발표한 적이 있다던지, 서울대를 수석으로 졸업하셨다던지, 영어를 엄청 잘하신다던지... 엄청난 기대를 품고 들은 교수님의 첫 'Can you hear me?'에서 난 광팬이 되어버렸다.

 

오토마타 강의의 풀 네임은 오토마타형식언어(Automata Formal Languages)이다. (이 강의에서 배우는 것은 한 마디로 Noam Chomsky 할아버지의 Chomsky hierarchy이다. 즉 regular(FA), context-free(PDA), recursively enumerable(TM)에 대해서 배운다.) 이번 학기에 들은 과목들 중 오토마타를 제외한 모든 과목들은 2학년에서 3학년 중의 학생들이 듣는 과목인데, 오토마타는 유일하게 안 듣고 졸업하는 사람도 정말 많은 악명 높은 과목이다. 컴퓨터과학과에서 가장 어려운 학부 과목이라고 하면 항상 언급되는 강의이자 동시에 컴퓨터과학과 명강이라고 해도 항상 언급되는 강의이다. (20학번은 두 명뿐이었다. ㅋㅋ)

 

굳이 이 강의를 들은 이유는 두 가지 정도가 있는데, 첫 번째는 이 분야가 궁금해서였고(예전 글에서 언급한 '컴퓨터에 대한 교양서적처럼 위장한 어떤 책'에 Turing machine과 halting problem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다.) 두 번째는 나를 테스트해보고 싶다는 오기가 있었다. 수학 잘하면 들어라, 머리에 자신 있으면 들어라 등의 이야기가 워낙에 많았어서 이걸 통해 나를 테스트하고 내 방향성을 잡고 싶었다. (세상엔 좋은 머리를 prerequisite로 하는 여러 가지가 있으니까...)

 

이런 것과 별개로 이 강의 또한 정말 만족스러웠다. 가장 먼저 교수님의 강의력이 아주 좋으시고 강의자료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제작되어 있었다. 또 강의만을 가지고 교수님이 어떤 분인지 평가하긴 어렵겠지만 작은 언행 하나하나에서 정말로 멋진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 이렇다 할 ToC(Theory of Computing) 랩이 거의 없는 것으로 들었는데, 한 학기동안 그 거의 없는 분야 연구자의 강의를 두 개나 들을 수 있었던 것이 정말 감사했다. (실제로 두 분은 이 쪽 연구 실적이 훌륭하시다.)

 

18.5학점의 강의와 교내 파이썬 튜터링, 개인적으로 진행한 고등학교 대학생 멘토링, 이런저런 회의까지 바쁘게 살다 보니 이번 학기도 정말 순식간에 지나갔다. 난 원래 노는 것을 진짜 좋아하고 말도 많고 태생이 관심종자인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학교에서 크고 작은 무대를 놓쳐본 적이 없었다.) 어느샌가 계속 무언가를 하고 배우고 발전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겨 자꾸만 나를 갉아먹었다.

 

위대한 사람들은 나보다 열심히 살았을 것이다, 더 바빴을 것이다라는 자기암시로 계속해서 내 몸에 마취를 했다. 여러 가지 마취엔 부작용이 있는 법이다. 내 어떤 부분이 망가지고 있다는 것을 깔끔하게 인정해야겠다. 이런저런 지병도 여러 번 찾아왔다. 큰 건 아니지만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수술을 대학 입학 후에 두 번이나 했다.

 

물론 군대를 가는 것이 행복한 일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아직까지는?) 군 입대가 기대된다. 얼마 전 카투사를 포기하고 산업기능요원 복무를 할까 깊게 고민하고 부모님과도 논의했지만, 산업기능요원 준비기간 동안 분명히 병이 날 거라는 판단 하에 얼른 입대하기로 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몸을 쓰는 것만큼 생각을 비우기 좋은 게 없다. 얼른 사회에서 벗어나 뇌를 쉬게 해주고 싶고 학기가 막 끝난 지금은 입대하기에 정말 좋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한다.

 

군대에서는 한동안 컴퓨터쪽에 대해서 생각을 안 하면서 살 거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의문이 들지만 최대한 노력해 봐야 한다.) 편한 마음으로 운동이나 열심히 하고 책이나 읽어서 건강한 몸과 세상을 보는 눈을 가지고 오고 싶다. 또 영어에 정말 집중해서 영어 실력을 더 다듬고 미군 친구들이랑도 친해져서 와야지. 그 기간동안 남들보다 뒤쳐질 순 있겠지만 난 천재이기 때문에 곧 더 잘해진다. 세상을 보는 눈만 가지고 온다면 사실 어떤 것도 문제가 아니다.

 

더캠프 입대 디데이가 세 자리였던 것이 정말 어제 같은데 어느새 D-14가 되어 있다. 2023년 1월 4일, 정말 오긴 올까? 상쾌한 마음으로 새해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기지개를 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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